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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지화모 필독강추2) 돈과 문명의 위기

Posted By 뜰이  |  12-03-27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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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문명의 위기
찰스 아이젠스타인

당신이 내게 100만 달러를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해보자. “이것을 많은 이익이 나도록 투자를 해주면, 큰 보상금을 드리지요.” 나는 영리한 인간이다. 왜 마다하겠는가? 나는 거리로 나가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무작위로 돈다발을 건넨다. 각자 1만 달러씩. 그 대신 그들은 각자 내게 5년 내에 갚겠다고 약속하면서 차용증을 갈겨써준다. 그러면 나는 돈의 원래 임자인 당신에게 가서 “보세요, 이 차용증들을요! 당신이 준 돈으로 연 20%의 수익이 나도록 했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매우 기뻐하며, 내게 많은 커미션을 준다.

이제 나는 커다란 차용증 꾸러미를 갖게 되었다. 나는 그것을 ‘자산’으로 삼아서, 그걸 담보로 더 많은 돈을 빌린다. 그렇게 빌린 돈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빌려주거나 나와 똑같은 짓을 하는 사람들에게 팔아넘긴다. 나는 또 채무자들이 상환불능상태가 될 경우를 대비하여 보험을 산다. 보험은 바로 그 차용증들을 가지고 산다! 차용증들은 돌고 돌면서 각각 새로운 대출금이 되고 누군가의 자산이 되어 그걸 근거로 더 많은 돈을 빌린다. 그런 과정에서 우리 모두는 엄청난 커미션과 보너스를 챙긴다. 그렇게 해서 시초의 100만 달러로부터 우리가 만들어낸 자산총액은 이제 50배가 되었다.
 
그러는 사이에 첫 차용증 상환 만료기간이 왔다. 어떻게 될까? 그 차용증에 자기 이름을 써넣었던 사람은 당장 내게 지불할 수가 없다. 실은 거의 대부분의 채무자들도 그렇다. 나는 이 당황스러운 사실을 가급적 오래 감춘다. 그러나 곧 당신은 눈치를 챈다. 당신은 당신이 내게 처음 주었던 100만 달러 더하기 이자를 되돌려 받기를 원한다. 그것도 현금으로. 나는 내가 갖고 있는 차용증들과 그 파생품들을 팔려고 애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다 눈치를 채고 아무도 사려고 하지 않는다. 보험회사는 내가 입은 손해를 메워주려고 하지만, 내가 보험회사에 주었던 차용증들을 팔 수 있어야만 그게 가능하다!

마침내 정부가 개입한다. 정부는 차용증들을 모두 사들이고 그 차용증들과 파생상품들을 갖고 있는 보험회사와 그 이외 모든 사람들을 구제한다. 그 총액은 원래의 100만달러를 훨씬 넘는다. 나와 내 동료들은 막대한 이익을 챙기고 은퇴한다. 그 비용은 우리가 아닌 모든 다른 사람들이 물어야 한다.
 
이것은 지난 10년간 금융산업에서 일어난 상황의 초기국면이다. 엄청난 부가 금융엘리트들에게 이전되었는데, 그 비용은 미국의 납세자들과 외국의 기업, 정부들 그리고 굴극적으로 저임금을 받으며 간접적으로 미국의 부채를 떠맡아온 외국의 노동자들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위기를 단순히 거대한 사기협잡의 결과로 본다면, 진상을 놓치고 만다.
 
나는 우리 모두가 한 시대의 종말이 가까웠음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한다. 극히 피상적으로 볼때는, 규제받지 않은 카지노식의 금융조작 시대가 끝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보다 깊은 차원이 있다. 실제로, 위기는 ‘밑바닥까지’ 뻗쳐가고 있다. 위기는 현재 이 세계에 있어서의 돈과 부의 본질 그 자체로부터 발생하고 있다. 그러므로 돈 그자체가 변화되지 않는 한 위기는 계속 심화될 것이다. 지금은 수세기 동안 형성되어 온 화폐제도의 최종단계라고 할 수 있다.

이자경제의 원리

오늘날 우리가 아는 돈은 언젠가는 위기를 맞고 붕괴할 수밖에 없는 구조로 설계되어 있다. 왜냐하면 돈은 이자를 추구하고 이자가 붙도록 되어 있으며 실제로 이자로부터 돈이 태어나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이 구조가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보기 위해서 금융의 기초를 한번 들여다보자.

돈은 누군가가 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받을 때 생겨난다. 부채는 뭔가를 지금 사기 위해서 장차 돈을 갚겠다는 약속이다. 다시 말해서 돈을 빌린다는 것은 지연된 거래형태이다. 나는 지금 뭔가를(내가 빌린 돈으로) 얻고 미래에 뭔가를(빚을 갚기 위해서 내가 파는 상품이나 서비스) 주기로 약속한다. 은행이나 기타 대출업자는 내기 빚을 갚을 수 있을 것이라는 합리적인 기대를 할 수 있을 때만 나에게 보통 돈을 빌려준다. 즉, 내가 동등한 가치를 가진 상품이나 서비스를 생산할 것이라는 합리적인 기대 말이다. 이 ‘합리적인 기대’는 담보물이나 신용정도에 의해 보증될 수 있다.

내가 돈을 쓸 때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나는 “ 나는 내가 사는 것과 동등한 가치를 가진 상품이나 서비스를 만들거나 제공하고 있다”라는 것을 보증하고 있는 것이다. 그 돈이 빌린 돈이라면, 나는 내가 장차 빌린 돈의 가치와 같은 상품/서비스를 제공할 것이라고 말하는 셈이다.

그리고 이자 문제가 있다. 은행이 돈을 빌려주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자 때문이다. 이자는 오늘날 돈을 만들어내는 원동력이다. 돈이 부채를 통해 만들어질 때마다 미래에 더 많은 돈이 만들어질 필요가 생긴다. 돈의 양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성장해야 한다. 이것은 상품과 서비스의 양이 시간의 경과와 함께 계속 성장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통화량이 상품과 서비스의 양보다 더 빨리 성장하면 그 결과는 인플레이다. 더 천천히 성장한다면- 예를 들어, 대출의 감소에 의해서- 그 결과는 파산, 불황, 혹은 디플레이다. 정부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통화공급량을 증가 혹은 감소시킬 수 있다.

첫째, 중앙은행으로부터 빌림으로써 돈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 돈은 은행에 예치되어 은행이 더많은 대출을 할 수 있게 하는 준비금이 된다. 은행이 화폐를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은 준비금요건에 의해 제한된다. 일반적으로 은행은 고객이 맡긴 예금 전체의 10%에 해당하는 현금(혹은 중앙은행으로부터의 예치금)을 갖고 있어야 한다. 나머지 90%는 대출을 할 수 있고 그 대출에 의해 새로운 화폐가 만들어진다. 이 돈은 예치금으로 은행으로 돌아오고 이것을 근거로 다시 그중 81%(90%의 90%)가 대출금이 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원래의 예치금으로 그보다 9배나 많은 새로운 돈을 만들 수 있다. 중앙은행으로부터 빌린 돈으로 정부가 쓰는 돈은 새로운 화폐창조를 위한 씨앗역할을 한다.(물론 이것은 은행의 자발적인 대출의사에 달려있다! 신용 동결상황에서 은행들은 여분의 준비금을 쌓아놓기만 할뿐이기 때문에 정부화폐의 반복적인 투입은 거의 효과를 보지 못한다)

통화량 증가를 위한 또 다른 방법은 준비금 요건을 낮추는 것이다. 실제로 이것은 적어도 직접적으로는 잘 행해지지 않는 방법이다. 그러나 지난 10년 동안 다양한 종류의 은행 이외의 대출기관은 이 준비금 요건을 비켜갔다. 그 결과는 전통적 금융에서처럼 원래의 가치의 9배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많은 돈, 심지어 70배 가까이까지 돈을 만들어내었다. 이로 인해 투자에 대한 수익률이 통상적인 금융의 수익률인 5% 정도를 훨씬 넘는 수준이 되었다.

새로이 창조되는 달러 하나하나는 거기에 이자가 부가된 새로운 부채달러를 낳는다. 이 부채는 언젠가는 상품이나 서비스로써, 혹은 더 많이 빌린 돈에 의해 상환된다. 그리고 이렇게 빌린 돈은 다시 더 많은 대출금에 의해서 상환될 수 있다... 그리고 그 돈은 상품이나 서비스를 사는데 사용될 것이다. 그러면 이자는 어딘가로부터 가져와야 한다. 기왕의 대출금에 대한 이자를 지불하기 위해서 다시 더 많은 대출을 받는다는 것은 단지 청산기일을 계속 뒤로 미루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자가 붙는 화폐’라는 이 시스템 전체는 돈과 교환되는 상품과 서비스의 양이 계속해서 성장하는 동안에는 잘 작동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위기는 새로운 돈이 상품과 서비스보다 더 빨리 만들어지는데 부분적인 원인이 있다. 이 상황을 벗어나는 데는 두 개의 길이 있을 뿐이다. 즉, 인플레와 디폴트(상환불능선언). 두 가지 방법은 모두 화폐의 파괴를 초래한다. 현재 금융 및 정치 엘리트들은 이 두 방법을 회피하려는 부질없는 시도를 하고 있다. 그들이 무엇보다 우려하는 것은 대규모파산에 의해 돈이 증발하는 사태이다. 왜냐하면 결국 그 돈은 그들 자신의 것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더 깊은 위기가 개입되어 있다. 무엇보다 화폐의 근간에 상품과 서비스 창조의 위기가 있고, 이 위기로 말미암아 지금 누구나 현재의 상황에 대한 요인으로 지목하고 있는 부동산거품이 생긴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상품과 서비스란 무엇으로 구성되는 것인지 명확히 해볼 필요가 있다. 경제학에서는 이들은 화폐와 교환되는 그 무엇을 가리킨다. 내가 당신의 아이들을 무료로 돌봐주면 경제학자는 그것을 서비스로 계산하지 않는다. 그것은 금융부채를 갚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내가 수퍼마켓에 가서 “내가 오늘 아침에 내 이웃 아이들을 돌보았으니 내게 식품을 주세요”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탁아소를 열어서 고객에게 돈을 청구하면 나는 ‘서비스’를 창조한 것이 된다. GDP가 상승하고 경제학자에 따르면 사회가 더 부유하게 된 것이다.
 
숲을 베어서 목재로 팔면 같은 상황이 발생한다. 숲을 건드리지 않고 그대로 두면 상품이 안 된다. 임도를 만들고 노동자를 고용하여 숲을 베어 나무를 구매자에게 운반해가면 그것은 ‘상품’이 된다. 나는 숲을 목재라는 상품으로 전환하고 그러면 GDP는 올라간다. 마찬가지로 새로운 노래를 지어서 사람들과 무료로 그것을 나누면 GDP는 올라가지 않고 사회는 더 부유해졌다고 간주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그 노래에 대한 저작권을 설정해서 판다면 그것은 상품이 된다. 혹은 나는 약초나 샤머니즘적 기술을 구사하여 병을 고치는 어떤 전통사회를 발견하여 그 문화를 파괴하고 그 사회가 제약기업에 의존적으로 되어 약품을 사도록 강제하고 그 토착민들을 자신의 땅에서 내쫓아서 더 이상 자급하는 농부가 될 수 없게 하여 먹을 것을 사야하도록 만들 수 있다. 그리고 빼앗은 토지를 바나나를 생산하는 대농장으로 만들어 그들을 고용할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세계가 훨씬 더 부유해지도록 돕는다. 나는 다양한 기능, 관계, 자연자원들을 화폐의 영역으로 끌고 온 것이다.

기본적으로 경제가 계속적으로 성장하고 (이자에 기반을 둔) 화폐시스템이 생존을 하려면, 갈수록 더 많은 자연과 인간관계들을 화폐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를 들어, 30년 전에는 대부분의 식사는 가정에서 이루어졌다. 오늘날에는 2/3의 식사는 바깥, 즉 레스토랑이나 슈퍼마켓 식품코너에서 이루어진다. 요리라고 하는 오랫동안 돈으로 지불되지 않았던 기능이 이제는 ‘서비스’가 되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우리는 더 부유해졌다. 그렇지 않은가?

지난 30년에 걸쳐 일어난 또 하나의 중요한 경제성장 요소, 즉 ‘탁아’ 역시 우리를 부유하게 해주었다. 우리는 지금 우리 자신의 아이들을 돌봐야하는 부담으로부터 해방되었다. 그 대신 우리는 전문가에게 돈을 지불한다. 전문가는 훨씬 능률적으로 아이를 돌봐줄 수 있다.
옛날에는 오락도 공짜로, 모두들 참가자가 되어 즐겼다. 모두가 악기를 연주하거나 노래를 부르면서 드라마에 참여했다. 미국에서는 75년 전만 하더라도 소도시마다 취주악단과 야구팀을 갖고 있었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서비스에 대해 돈을 지불한다. 경제는 성장했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위기는 화폐로 변환시킬 수 있는 사회적, 자연적, 정신적 자본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에 기인하고 있다. 몇 세기에 걸쳐 끊임없이 계속돼온 화폐창조의 결과 우리에게는 팔 수 있는 게 거의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 것이다. 우리의 숲은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망가졌고, 우리의 토양은 고갈되고 바다로 쓸려 나가버렸다. 물고기들은 거의 다 포획되고, 우리의 쓰레기를 순환시킬 지구의 재생능력은 고갈되어버렸다. 우리의 문화적 보물, 즉 노래, 이야기, 이미지, 아이콘들은 약탈되고 저작권행사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생각할 수 있는 어떤 근사한 문구라도 모두 다 상표가 등록된 슬로건이 되었다. 우리의 인간관계와 능력들마저 약탈되어 이제는 우리가 그것을 도로 사야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최근까지 돈으로 지불할 필요가 없었던 것, 즉 음식, 거처, 의복, 오락, 아이 돌보기, 요리 등을 위해서 낯선 사람에게- 따라서 돈에- 의지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신성한 유산의 마지막 흔적, 즉, 건강, 생태계, 게놈, 심지어 우리의 정신까지 팔아넘기게 되었다. 이 과정은 우리 시대에 절정을 이루고 있다. 특히 미국과 이른바 ‘선진국’에서 이것은 거의 완전히 실현되었다. 개발도상국에는 아직 증여 문화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남아있다. 거기서는 자연적 및 사회적 부가 아직은 사적 소유물이 아니다. ‘세계화’란 이러한 자산을 박탈하여 화폐라는 기계의 만족을 모르는 성장욕구를 채우기 위한 과정이다. 그러나 이 약탈도 한계에 부딪히고 있다. 왜냐하면 약탈할게 거의 남아있지 않고 또 이 약탈에 대한 저항세력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통화 공급량-그리고 그에 따른 부채의 양-은 수십 년간 상품과 서비스 생산을 능가해왔다. 이 현상은 자본주의 경제학의 고전적 문제, 즉 과잉공급문제에 깊게 연관되어 있다. 맑스주의에서 말하는 자본의 위기는 새로운, 고수익산업과 시장이 존재하는 동안 미래로 계속 미루어질 수 있다. 그 산업과 시장은 이윤율 하강, 임금하락, 소비침체, 과잉생산이라는 악순환을 벌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존속은 이 새로운 산업들이 한없이 출현해야만 가능하다. 그리고 이 산업들은 사회적, 자연적, 문화적 및 정신적 자본을 포괄하는 무한한 새로운 영역을 화폐로 변환할 수 있어야 한다. 문제는 이 자원들이 유한하고 고갈에 이를수록 그것을 끌어내는데 더 고통스럽다는데 있다. 그러므로 금융위기와 동시에 우리는 생태적 위기, 건강위기에 직면한다. 그것들은 긴밀하게 상호 연관되어 있다. 우리가 더 많은 지구를 화폐로 변환시키고, 더 많은 건강을 화폐로 변환시키기 전에 생명의 기반 그 자체가 위협을 받는 것이다.

화폐로 바꿀 것은 남아있지 않다.
비화폐적 공공재의 고갈이라는 사태에 직면하여 금융자본은 스스로를 잡아먹음으로써 필연적인 결과를 지연시키려고 해왔다. 지난 90년대의 인터넷산업 거품은 생산적 경제가 더 이상 화폐의 성장과 보조를 같이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많은 여분의 화폐가 상품과 서비스의 실현이라는 미뤄진 약속을 채워줄 수 있는 장소를 찾아서 미친 듯이 돌아다녔다. 그리하여 필연적인 붕괴를 지연시키기 위해서 미국의 중앙은행(연방준비제도이사회)은 금리를 대폭 내리고, 오래된 부채를 새로운 부채로 갚도록(실제 상품과 서비스로 갚는 게 아니라) 통화정책을 느슨하게 했다. 그로 인한 새로운 금융상품과 서비스는 방대한 규모의 속임수 회계로 구성된 가짜 물건들이었다.

많은 전문가들은 주택저당(mortgage)에 기반을 둔 파생상품금융과 기타 수단들로 구성된 금융피라미드가 ‘폰지’형(피라미드식 이식사기수법, 찰스 폰지라는 사기꾼의 이름에서 유래-역주)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주목했다.
이것은 거품을 형성하여 오로지 그 속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돈이 기하급수적으로 유입됨으로써만 지탱 가능한 시스템이었다. 그 자체로 이것은 우리 시대의 상징이다. 지속불가능한 피라미드 시스템은 비단 월스트리트 카지노 경제에 국한된 게 아니다. 유한한 자원을 영구적으로 화폐로 변환시켜야만 하는 구조를 가진 보다 큰 경제체제도 지속 불가능하기는 마찬가지다. 그것은 마치 점점 더 높이 타올라 마침내 모든 사용가능한 연료를 다 태우고 마는 모닥불 같은 것이다. 불이 기존의 화학적 결합조직을 깨트려 열을 해방시키는 것처럼, 우리의 경제는 공동체와 자연과 문화라는 결합조직을 깨트리고 화폐라고 불리는 에너지를 해방시켜왔다. 연료공급이 유한함에도 불구하고 불이 영원히 더 높이 타오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바보뿐이다.

이 비유를 확장한다면, 최근의 경제의 탈산업화와 금융화는 열을 이용해서 더 많은 연료를 만들어내려는 기도라고 할 수 있다. 열역학 제2법칙에 따르면, 만들어진 양은 언제나 그것을 만들어내는데 소모된 양보다 적다. 옛 부채(원금 더하기 이자)를 갚기 위해서 새로운 돈을 빌리는 일은 오래갈 수 없다는 게 명백하다. 하지만 경제전체가 10년 이상 해왔던 게 바로 그 짓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어리석음을 그만둔다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연료고갈이라는 사태에 직면한다(여기서 연료고갈이라고 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연료자원을 뜻하는 게 아니라 상품화될 수 있는 모든 자연 및 문화적 결합조직을 뜻한다). 현재의 경제 위기에 대한 해결책으로 제시되는 대부분의 방책은 더 많은 연료를 찾으려는 것이다. 더 많은 유정을 뚫거나 더 많은 녹색공간을 포장하거나 혹은 소비를 촉진하려는 이러한 제안들이 겨냥하는 목표는 경제성장의 재점화이다. 즉 상품과 서비스의 영역을 확장하자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돈으로 지불할 수 있는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자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우리 조상들은 상상도 못했을 만큼 오늘날 우리는 우리의 물, 우리의 노래에 대해서도 값을 치른다. 화폐로 바꿀 수 있도록 남아있는 게 더 있는가?
 
불가피한 붕괴는 목전에 다다랐다. 아니 우리는 붕괴의 한가운데에 있다. 정부의 첫 반응, 즉 구제금융정책은 실제 상품과 서비스보다 훨씬 많은 화폐라는 탑을 지키고자 하는 기도이다. 예견대로 구제금융은 비참한 실패로 돌아갔다. 두 번째 반응은 오바마에 의한 대규모 경기자극책이다. 그러나 이것은 좀 다른 그리고 더 심오한 이유로 실패할 것이다.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가 극한까지 왔기 때문이다. 문명의 생태적 기반을 파괴하지 않고 우리의 쓰레기를 받아들일 수 있는 자연의 수용한계는 지나갔고, 사회는 더 이상 공동체적 관계에 대한 파괴를 견딜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우리의 숲은 더 이상의 벌목을 견딜 능력을 잃었고 인간의 신체는 유독성 물질로 넘쳐나는 사태를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우리의 신용제도가 한계에 이르렀다는 사실은 이제 우리에게 화폐로 바꿀 수 있는 게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알려준다.

우리는 정말로 더 많은 도로와 교량이 필요한가? 우리는 그것들을 지탱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에 따른 더 많은 산업경제를 지탱할 수 있는가? 정부에 의한 경기부양책은 기껏해야 현재의 경제시스템을 2~3년 더 연장시킬 것이다. 그리하여 잠깐의 성장기간이 있을 것이며 그 기간에 우리는 자연과 정신과 육체와 문화에 대한 약탈을 완성할 것이다. 이러한 마지막 공공재의 흔적들이 사라질 때 지구전역에 걸친 대규모 인플레와 통화붕괴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현재의 위기는 실은 1930년대에 시작된 사태의 최종단계이다. 이자율과 함께 팽창하는 화폐와 보조를 맞추어야 한다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해결책들이 잇달아 적용되었으나 실패했고, 결국은 고갈되고 말았다. 첫 번째로 강구된 효과적인 해결책은 전쟁이었다. 그 상태는 1940년 이후 항구적인 것으로 되어왔다. 불행하게도 아니 다행스럽게도 핵무기와 인간의식상의 변화는 끊임없는 군사적 증강이라는 해결책에 제한을 가했다. 그이외의 해결책들-세계화와 과학기술에 의해 일찍이 상품화된 적이 없던 인간적 기능들을 대체하는 상품과 서비스를 개발하고 기술의 힘을 이용하여 종래에는 닿을 수 없었던 자연자원을 약탈하며,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살을 뜯어먹는 금융메커니즘의 개발-도 마찬가지로 그 수명을 다했다. 내가 고려하지 못한 부의 영역이 존재하지 않은 한 그리고 우리가 빠져들지 모를 새로운 빈곤, 비참, 소외가 존재하지 않는 한 필연적인 사태의 도래는 더 오래 지연될 수 없다.

자급의 혁명
임박한 위기에 직면하여 사람들은 흔히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묻는다. “금을 사야하나? 통조림을 사서 쌓아둬야 하나? 먼 곳에 튼튼한 피난처를 세워야 하나? 무엇을 해야 하나?” 나는 다른 질문을 하고 싶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일은 무엇인가?” 집중하는 위기는 커다란 기회를 준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디플레, 즉 화폐의 파괴는, 화폐의 창조가 절대적으로 선한 것이라면 절대적으로 악한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본바와 같이 화폐의 창조는 많은 점에서 우리 모두를 빈곤하게 만들었다. 그런 점에서 화폐의 파괴에는 우리들이 진정으로 부유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가능성이 들어있다. 그것은 잃어버린 공공재들을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우리는 실제로 불황 때마다 이 기회를 갖는다. 그 상황에서 사람들은 더 이상 다양한 상품과 서비스를 위해 지불할 돈이 없다. 그러면 친구들이나 이웃들에게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거래행위를 가능하게 해줄 돈이 없을 때 증여경제가 재출현하고 새로운 돈이 창조된다. 그러나 흔히 사람들은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사력을 다해서 싸운다. 경제 위기에 대해서 사람들이 나타내는 습관적인 첫 반응은 더 많은 돈을 벌거나 가지려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돈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서둘러 바꾸려 한다. 부채쓰나미는 모든 공공재를 상품화하도록 엄청난 압력을 가한다. 우리는 알래스카의 석유탐사나 심해의 유정개발을 요구하는 목소리에서 이 현상을 본다. 그러나 지금은 진지하게 그 반대과정을 시작할 때이다. 그리하여 상품과 서비스 영역에서 이탈하여 증여와 호혜, 자급, 공동체적 나눔의 영역으로 되돌아가야 할 때이다. 주의할 것은 어차피 이것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통화위기 이후에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거나 너무나 가난하여 물건을 살수 없게 되면 사람들은 서로 돕고 살 수밖에 없다. 그러면 진정한 공동체들이 다시 출현할 것이다.
 
그러는 동안 자연적, 사회적 자원의 상품화를 막기 위한 우리의 노력은 모두 화폐의 붕괴를 재촉하면서 동시에 그 피해를 완화할 수 있다. 개발로부터 우리가 지키는 숲, 우리가 중지시키는 도로건설, 우리가 세우는 협동조합, 스스로 질병을 치유하고 집을 손수 짓고, 스스로 요리를 하고, 옷을 만드는 일, 세계를 집어삼키는 ‘거대기계’로부터 우리가 지켜내는 모든 것은 ‘거대기계’의 수명을 단축시키는데 기여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해보라 이미 우리가 생활필수품 중 일부를 돈에 의지하지 않고 조달하고 있다면 화폐의 붕괴는 별로 큰 어려움을 주지 않을 것이다. 사회적 수준에서도 마찬가지다. 삶의 화폐화로부터 벗어난 네트워크나 공동체는 모두 화폐붕괴 후의 삶의 지속과 부유함을 약속해줄 것이다.

어딘가에서 나는 상호신뢰와 감가원칙(시간의 경과에 따라 이자가 붙는 관행적 화폐와 반대로 시간의 경과에 따라 가치가 줄어들도록 고안된 화폐-역주)에 토대를 둔 대안적 화폐시스템에 관해서 묘사하였다. 그 시스템은 좋고, 진실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전부 돈으로 변환시키지 않는다. 이 시스템은 오늘날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인간 다른 자아감각을 탄생시킨다. 그 시스템 속에서는 내가 많이 가지는 것이 당신이 덜 가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간적 차원에서, 우리가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심오한 혁명은 우리의 자아감각, 우리자신의 정체성에서의 혁명이다. 데카르트와 아담스미스의 사상을 뒷받침하는 분열된 자아는 효력을 다했고, 이제 낡아빠진 것이 되었다.

우리는 우리자신이 타자와 모든 생명의 총체성으로부터 분리되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이자는 이 통합성을 깨트린다. 그것은 타자의 희생을 전제로 분열된 자아의 성장을 추구하는 것이다. 아마도 이 에세이를 읽는 사람은 누구든지 불교적 관점에서든 에콜로지의 관점에서든 상호연결성의 원리에 공감할 것이다. 이제는 그 원리를 실제로 체현할 때이다. 이제는 증여의 정신으로 들어갈 시간이다. 모든 차원에서 당신에게 손해되는 것은 나에게도 손해가 된다는 진실이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 영구적인 이익이라는 이데올로기는 우리들을 비참한 빈곤상태로 몰아왔고, 그 결과 우리는 지금 필사적으로 맑은 공기를 찾아 헐떡이고 있다. 그 이데올로기 그리고 그 위에 구축된 문명은 지금 붕괴되고 있다.
 
개인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그 붕괴를 막거나 지연시키기 위해서 행하는 우리의 모든 행동은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다. 우리가 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복합적인 위기들에서 살아남기를 원한다면 살아남고자 애쓰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애쓰는 것은 분열의 정신, 죽어가는 과거에 매달리는 일이다. 그 대신, 우리는 우리의 시각을 재통합으로 향하여 우리가 무엇을 줄 수 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각자 좀 더 아름다운 세상을 위해서 무엇을 기여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유일한 책임이자 우리의 안전을 보장하는 유일한 길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지금 붕괴중인 화폐경제의 파괴과정에 우리 자신이 의식적으로, 목적을 분명히 하면서 참여할 필요가 있다. 아직 투자할 돈이 있다면, 그것은 공동체를 재건하고 자연을 보호하며, 문화적 공공재를 보존할 수 있는 일에 투자해야 한다. 그 투자에 대해서는 제로 혹은 마이너스의 금융이익을 기대해야 한다. 투자할 돈이 있든 없든, 우리는 또한 화폐경제로부터 벗어남으로써 이미 팔려버린 것을 복구하는 데에 기여할 수 있다. 돈을 지불하지 않고 나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행하고 재활용품이나 버려진 물건들을 다시 사용하며, 가급적 물건을 사지 않고 만들어 쓰며, 팔지 말고 주고, 나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새로운 기술, 노래, 예술을 가르쳐주면 그러한 것은 모두 화폐의 지배를 약화시키고, 증여경제를 성장시킨다. 증여의 세계는 우리들에게 가까이 와있다. 그것은 우리의 심금을 건드리고, 우리의 너그러움을 일깨운다. 지구의 아름다움이 소진되기 전에 이 부름에 응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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